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게이 코롤료프 (문단 편집) === 독일 개발진과 협업 ===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독일은 탄도미사일 [[V2]]를 개발했다. 1944년에야 등장했지만, 연합군은 제공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그 속도 때문에 전혀 막을 수 없었다. 이 로켓의 중요성을 알게 된 스탈린과 소련군 수뇌부는 이의 획득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반해 소련이 가지고 있던 로켓은 그저 유도장치도 없는 단거리 로켓 [[카츄샤]]가 전부였다. 카츄샤 로켓은 [[독소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기술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의 [[신기전]]과 다를 바 없는 유치한 수준이었다.[* 이 작품은 대숙청 이전에 코롤료프가 일하던 로켓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으로, [[그리고리 쿨리크]] 때문에 사장될 뻔 했지만, 독소전쟁에서 대활약을 한다.] 소련군은 독일의 V2 생산 공장들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 중요성을 파악한 소련군 수뇌부는 소속 과학자들로 하여금 V2를 평가하게 했고, [[발렌틴 글루시코]]는 독일로 파견되어 V2 로켓을 보았는데, 이것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코롤료프 뿐이라고 상부에 보고하여 코롤료프도 V2의 기술 습득을 위해 독일로 파견되었다. 당시 모든 군소속 과학자들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공군 [[대령]]으로 복직하여 독일의 여러 곳에서 관련 정보를 수집하였다. 소련은 생산공장을 접수할 수 있었지만, 로켓 개발진이 숙청되었기 때문에 단시일안에 이를 제대로 역설계하여 재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을 흡수하려면 독일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소련 당국은 V2를 개발한 독일 기술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소련은 배급 확대와 많은 연봉 등 특전을 내걸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개발자급 인재들은 대부분 [[미국]]에 투항했다. 하지만 폰 브라운과 사이가 무척 나빴던 헬무트 그뢰트룹(Helmut Gröttrup) 등 일부 과학자들은 자발적으로 소련으로 투항했다. 그뢰트룹은 원래 미군점령지에 있었으나 좋은 조건을 들고 온 소련 공작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발적으로 소련 점령 지역으로 와서 소련과 계약했다. 소련은 이들의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서 자신의 독일 점령지에 노르트하우젠 (Nordhausen) 이라는 위장회사를 세우고, 독일 과학자들을 고용했고, 여기서 독소 연구진이 협업하게 했다. 이 회사의 수석 설계자가가 코롤료프였고, 차석 설계자가 글루쉬코였다. 소련은 전쟁 직후에 나라가 말이 아닌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레벨의 소련과학자의 몇 배의 연봉을 주는 등의 소련 기준에서는 특전을 베풀었다. 이것이 미국으로 간 독일과학자들이 받은 연봉에는 미치지 못해서 그들이 소련에서 수용소에서 박봉을 받으며 갈려나갔다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 전쟁으로 서부가 완전히 잿더미가 된 소련과 전쟁으로 피해가 거의 전무했던 미국의 경제 형편을 비교한다면 딱히 소련이 이들을 푸대접한 것은 아니다.[* 그뢰트룹만 하더라도 소련에서 방 6개 공간의 집에 운전사 딸린 자동차를 배정받고, 월급으로 4500루블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소련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700루블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관이 동독에 있는것도 비밀유지가 어렵게 되자 1946년 아예 이들을 모조리 소련영토로 강제로 이주시켜 연구에 종사시켰다. 비단 로켓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여러 인재들을 강제 이주시켜서 소련 내에서 기술이전에 종사시켰다.[* 이 강제이주를 오소아뱌힘 (Osoaviakhim) 작전이라고 한다. 독일의 기술 수준이 소련보다 훨씬 앞서 있던 기계, 항공, 광학 관련 기술자들이 거의 납치되어 소련으로 강제이주해 관련 기관에서 종사했다. 다만 이들은 대부분 1953년까지는 모두 동독 혹은 서독으로 돌아왔으며, 강제 이주당했지만 신분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 영입 기술자였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의 몇배 월급을 주는 등, 소련 기준으로는 꽤 괜찮은 대접을 했다.] 소련은 자유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항시 감시를 받았으며, 외부와의 연락도 극히 차단되는 등, 거의 외국에서 감금상태나 다름 없었지만, 사실 소련인들 대부분도 비슷한 감시하에 살던데다가, 이들의 조국이었던 나치독일 하에서도 이들 과학자들이 게슈타포의 감시나 사찰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치에 굉장히 협조적이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조차도 나치독일 시절 한 파티에서 "로켓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주개발이다"라고 말했다가 사포타주 혐의로 게슈타포에 체포된 바 있다.] 게다가 미국으로 간 독일과학자들조차도 다른 의미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미국의 반독일 정서 때문에 폰 브라운등은 처음에 공항에서 스위스인으로 행세해야 했고, 나치독일이나 소련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겠지만, 군기지 같은 곳에 사실상 연금되었으며[* 이들이 처음 일하게 되었던 사막 한가운데 있는 텍사스 [[엘 파소]]에 있는 군부대인 포트 블리스였는데 사실상 감금상태나 다름 없었다.], 여기서 풀려나서도 상당기간 동안 미국 공안기관의 감시를 받았다.[* 폰 브라운조차도 계속 FBI의 감시를 받고 있었고, FBI에서는 정기적으로 그에 대한 사찰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게다가 미국 과학자들의 텃세때문에 미국행 독일 과학자들은 다른 연구에서는 배제되고, 10년간 고액연봉을 받으며 V2 복제 같은 하찮은 일에만 종사했다.미국이 이들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된 계기는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였다. 소련은 약 5,000명이나 되는 독일의 로켓 관련 인물들을 확보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페네뮌데 로켓 센터에서 일하던 제조 노동자들이었고, 개발자급 과학자는 약 170명 정도 모을 수 있다. 이 중 가장 핵심 인물은 헬무트 그뢰트룹(Helmut Gröttrup)이었다. 소련은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등의 여러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로켓의 구조면에 대해서는 상당한 노하우를 갖추고 있었으나, 두뇌에 해당하는 유도장치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 없었는데, 그뢰트룹은 이분야에서 당시 세계 최고의 전문가였으므로, 소련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인재를 확보한 셈이었다.[* Space Race 다큐에서 영입~~납치~~하는 장면이 묘사 되는데. 연회를 열어 보드카를 잔뜩 먹여서 만취상태로 만들고 집으로 보내서 재웠다가 새벽에 강제로 소련으로 끌고 갓다. ~~오오 소련식 인재 스카우트~~][* 그뢰트룹은 이후 미국의 공작으로 동독으로부터 1953년 [[서독]]으로 갔다.][* 사족으로 시열대상 독소전쟁이 없어 코롤료프가 숙청당한 대체역사 RTS 게임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 등장하는 소련의 V2 로켓은 이로 인해 그뢰트룹을 납치하지 못했는지 그냥 좀 멀리 발사되고 커다란 카츄샤일 뿐이다. 반면 서방세계는 자유진영 연합국의 일원인 독일이 미국으로 안간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진두지휘하에 세계 최초의 첩보위성을 쏘아올리며 우주시대를 소련보다 훨씬 앞서서 열었다.] 소련도 처음에 그뢰트룹 등 핵심과학자들에게 높은 연봉을 주겠다고 꾀었던 만큼 이들에게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당시 소련 과학자들보다 높은 연봉을 주는 등 약속했던 대로 대우해 주었지만 그 밖에는 소련의 감시 속에 사실상 감금당해 생활해야 했고, 이를 항의하자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 이상태가 싫다면 우랄 산맥으로 보내주겠다는 답변 뿐이었다. 코롤료프 등 소련 과학자들이 이끄는 연구팀들은 독일 과학자들에게 독일의 앞선 기술을 전수받고, 독일 로켓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을 시켜 1947년 V2를 복제하여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코롤료프는 독일인들이 가진 관련 지식을 제대로 흡수해 소화해 냈는데, 이는 당연히 코롤료프가 이미 전쟁 전부터 관련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로켓에 관한 이해도가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시어도어 폰 카르만, 프랭크 멜리너 등의 [[JPL]]인재들이 전쟁 이전부터 로켓을 연구해왔고, 이들이 고유하게 연구하던 것들은 [[폰 브라운]]이 미국에 영입되면서 거의 엎어지고, 브라운이 연구 방향을 이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JPL은 이전에 연구해 놓은 지식이나 인프라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 NASA의 우주선 개발의 주축 개발기관이 된다.] 이것이 소련 최초의 단거리 액체 연료 로켓 겸 미사일인 R1 로켓이었다. 이후 V2를 개량하여 R2를 개발하는데 R2는 V2의 두배의 사정거리를 보였다. 이후 독일 과학자들과 기술자들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은 소련은 자체역량이 성숙되자 1952년부터 독일인들을 배제하고 소련인들로만 구성된 연구소에서 개발을 진행했다. 냉전시절에는 독일인들이 계속 억류되어 있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1950년부터 계약기간이 끝난 사람들은 순차적으로 동독지역으로 보내주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귀국한 사람들이 그뢰트룹 등 핵심 개발진이었는데, 이들의 계약은 1953년까지였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계약기간을 채우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사실 이들 대부분은 현지에서 고용된 단순 직공이었고, 페네뮌데는 동독의 영역이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이들의 의사를 반하고 고향이 아닌 곳에 보낸 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 중에 폴란드에 합병된 동프로이센 출신이 있었고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동프로이센은 페네뮌데 바로 옆이다), 동프로이센 출신은 서독에서 오히려 이들을 실향민으로 우대해주었기 때문에 이곳 출신은 서독 이주를 희망했다. 1950년대 서독에서는 동프로이센 등 실향민들이 만든 정당이 연방 의회에서 수십석을 차지할 정도로 서독에서 실향민들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철저한 반공성향으로 기민당의 지지기반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공산정권이 싫거나 혹은 미국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다시 이주했다. 소련 제어 시스템의 개발에 결정적 도움을 준 헬무트 그뢰트룹이 대표적인 경우로, 이 사람은 동독으로 귀국했으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망명하고 기업가로 활동하면서 재벌이 되었다.[* 미국은 그뢰트룹을 미국으로 데려오려고 했으나 그뢰트룹은 미국에 가기를 거부해 실패했다.] 다만 러시아는 자국 우주프로그램에서 이런 독일 과학자들의 기여나 도움은 언급하기 꺼린다. 이는 [[독소전쟁]]의 앙금때문에 국민정서상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사실 미국도 마찬가지인데, 브라운만 그나마 알려져 있을 뿐, 브라운을 따라온 30여명의 핵심 개발진의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이들은 달탐사가 끝난 1970년대까지 미국의 우주개발의 핵심 인력으로 일했지만, 이들의 업적도 대중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